진짜 손이 덜덜 떨려서 키보드도 제대로 못 누르겠어요. 1년 넘게 의사 행세하면서 저랑 사귄 그 인간, 아니 그 사기꾼 정체를 오늘 병원 바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자기소개부터가 완전 화려했어요. 도심 한복판 대형 성형외과에서 근무하는 촉망받는 성형외과 의사라더군요. 매일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 매고 흰 가운 입은 셀카 보내주고, 수술 들어간다며 연락 두절도 밥 먹듯 했죠. 솔직히 그 타이틀 보고 마음 준 거 맞습니다. 곧 서른인데 조건 따지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
오늘 터진 건 이거예요. 제가 코 재수술 고민 중이라 남친한테 직원 할인이나 지인 할인 좀 해달라고 했거든요. 그 정도 포지션이면 원장한테 한마디면 거의 공짜로 될 줄 알았죠. 근데 계속 말을 돌리는 거예요. 병원 규정이 엄격하다, 나중에 내가 개원하면 그때 예쁘게 해주겠다는 둥 완전 동문서답만 하더라고요.
답답해서 예고도 없이 병원 1층 로비로 갔어요. 안내 데스크 옆 소파에 앉아서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녁 먹으면서 확실히 얘기하려고요. 세 시간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복도 안쪽에서 걸레 끄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 돌렸는데, 땀에 절은 채 대형 물걸레를 밀고 가는 뒷모습이 너무 익숙한 거예요. 위생팀에서 입는 연하늘색 위생복에 장화까지 신은 채로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요. 복도 한가운데서 박선생! 하고 소리 질렀더니 그 인간이 걸레 자루를 놓치면서 얼굴이 시트지처럼 하얘지더군요. 비상계단 쪽으로 끌고 가서 따지니까 실토하는데, 의사는커녕 간호조무사도 아니고 그냥 수술실 청소 외주 용역 직원이었어요. 1년 동안 보내준 그럴싸한 수술실 셀카들 전부 새벽이나 야간에 청소하러 들어가서 몰래 찍은 거였다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뺨 때리고 뛰쳐나왔는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분을 넘어 허탈해요. 그동안 제가 사준 넥타이에 지갑에 생일이라고 잡아준 호텔이 얼마예요. 주변 친구들은 다 제가 의사 사모님 되는 줄 알고 부러워 죽겠다는데 당장 모레 모임에서 뭐라고 해명해요? 이거 혼인빙자 사기 고소 되는 거 맞죠? 제 1년 인생 누가 보상해주냐고요.
글 올리자마자 그 인간한테서 연락이 왔다. 자기는 날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랬다며 내가 의사 아니면 만나주지 않을까 봐 무서워 거짓말을 했다고 울먹이더라. 그러면서 그동안 생일 호텔이며 넥타이, 명절 한우 세트까지 영혼까지 털어 마련해 준 선물이라며 오히려 생색을 냈다.
내가 병원 쪽에 알리겠다고 하자 비웃기까지 했다. 이미 내가 로비에서 소리 지르고 난리 친 탓에 병원에서 잘렸다며, 내가 코 재수술 할인해달라고 떼쓰며 복도에서 고함친 장면이 전부 녹화돼 있어 영업 방해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지인들은 소문이 퍼졌는지 단체 대화방에서 모두 입을 닫았다. 특히 평소 은근히 깔보던 김OO는 내 SNS에 대놓고 어머 오빠 병원 청소업체였어? 우리 남편이 거기 원장이랑 친한데 진작 말하지라며 비꼬는 댓글을 달았다. 쪽팔려서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나고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