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플래너 10년 차, 진상 중에 진상은 다 봤다 자부했는데 오늘은 진짜 역대급을 만났습니다. 오전 10시 VIP룸 통유리 앞에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서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 냄새 풀풀 풍기는 30대 후반 남자에 얼굴에 필터 씌운 듯 화려한 20대 중반 여자가 팔짱을 끼고 들어오더라고요. 첫인상은 그냥 요즘 흔한 돈 많은 오빠랑 어린 신부겠거니 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견적표를 펼치자마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제일 윗줄을 탁 찍더군요. 무조건 제일 비싼 패키지로 해달랍니다. 그러면서 씨익 웃으며 ‘이번엔 제대로 해야지, 지난번엔 진짜 볼품없어서 창피했거든’ 이러는 겁니다. 옆에 있던 여자가 얄밉게 눈웃음 치면서 ‘오빠 그래도 언니가 해온 가구들 귀엽지 않았어? 나름 정성인데’ 하고 맞장구를 치는데, 그때부터 공기가 싸해지더라고요.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코웃음을 쳤습니다. ‘야 말도 마, 그 여자가 시골에서 처박고 온 그 촌스러운 혼수들 있잖아. 거실 소파 하나도 어디 듣보잡 싸구려더만. 집 들어갈 때마다 그거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혔어. 너한테는 그런 쓰레기 같은 거 절대 안 시켜. 싹 다 이태리 명품으로 맞춰줄게’ 이러는데,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상간녀 앞에서 본처 혼수를 쓰레기 취급을 하다니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펜을 멈추니까 여자가 슬쩍 제 눈치 보며 ‘오빠, 플래너님도 계시잖아...’ 하고 꼬리를 내리더군요. 근데 남자는 전혀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더 키웁니다. ‘뭐 어때, 어차피 내일 구청 가서 도장 찍으면 끝인데. 그 여자도 곧 알게 되겠지’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혼 서류 잉크도 안 마른 게 아니라 아직 도장도 안 찍은 상태에서, 대놓고 상간녀 데리고 웨딩 상담을 온 거예요.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더군요.
그 뒤로도 상담 내내 본처가 해온 예물이니 가구니 하나하나 꺼내 들면서 ‘촌티 난다, 안목 없다, 싸구려다’ 비하를 멈추질 않더군요. 옆에선 그 어린 여자가 고개 끄덕이며 맞장구치고. 솔직히 저도 예전에 철없을 때 유부남인 줄 모르고 만난 적 있다가 걸려서 바닥까지 찍어본 적 있어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하고 넘기려 했거든요? 근데 이건 급이 다르잖아요. 같이 산 사람 욕을 저렇게까지 입에 올릴 수 있다는 게 소름이더라고요.
속으로는 ‘너희 둘 진짜 제대로 벌 받는다’ 저주하면서도 겉으로는 영업용 미소 장착하고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저희 샵은 상담 테이블마다 분쟁 대비해서 자동 녹음이 다 되는데, 그걸 모르고 둘이서 신나게 본처 욕을 녹음기에 다 박아 넣더라고요. 본처가 들인 돈이랑 정성 다 쓰레기 취급하면서 자기들끼리 꿈꾸는 화려한 결혼식이라니, 진짜 속이 뒤집혀서 토할 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