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죽어라 부러워하는 한남동 테라스 펜트하우스, 매일 아침 8시 현관 앞에 놓이는 8만원짜리 유기농 식단 박스, 거기에 외국계 IB 이사 남편까지. 내 인생은 백화점 쇼윈도 안에 세워둔 마네킹 그 자체였어요. 인스타에 사진 한 장 올리면 2만개 하트에 부럽다는 디엠이 쏟아지고, 난 그 허영에 취해서 내 발 밑에 금 가고 있는 바닥은 일부러 안 본 척 살았죠.
어젯밤 11시쯤 남편이 회식 때문에 늦는다고 톡 오고, 심심해서 평소엔 얼씬도 안 하던 서재에 들어갔어요. 책장 아래쪽 금고 달린 서랍이 5cm 정도 벌어져 있더라고요. 닫으려다 말고 열어봤는데 안에 A4 두툼한 바인더 하나가 딱. 표지에 내 이름이랑 'Project Crystal'이라고 박혀있었어요. 첫 장 넘기자마자 소름 끼치는데, 우리 첫 만남 날짜부터 프러포즈 멘트, 결혼 발표 타이밍, 심지어 내가 인스타에 올렸던 202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케이크 사진 구도랑 캡션 문구까지 분 단위로 짜여진 타임라인이 표로 정리돼 있더군요.
더 미친 건 그 다음 장 '비용 정산' 페이지였어요. '의상 및 주얼리 렌탈료', '식단 코디네이팅 비용', '팔로워 3만 유지비' 이런 항목별로 금액이 찍혀있고, 전부 내 카드가 아니라 어디 펀드 법인 계좌에서 나간 내역이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누린 모든 게 남편 돈도 아니고 투자자들 돈으로 굴린 쇼였던 거고, 나는 그 펀드 수익률 띄우려고 고용된 '홍보용 마네킹'이었던 거죠. 바인더 맨 뒷장엔 여자 신분증 사본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 여자가 등기부등본상 이 펜트하우스 진짜 주인이더라고요. 남편이 말하던 파트너라는 그 여자.
결국 난 이 집을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장식용 소품이었던 거예요. 남편이 속삭이던 사랑한다는 말도 다음 분기 투자 유치할 때 보여줄 행복한 부부 시나리오 대사였던 거고. 내 인생 통째가 기획된 사기극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이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쇼윈도 깨지는 순간 내 손에 남는 건 리볼빙 돌려막기한 카드값이랑 가짜 인생의 쓰레기뿐인데, 생각만 해도 손이 떨리고 숨이 막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