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중순, 영하 10도 찍고 칼바람 부는 날이었어요. 시댁에서 온 가족 저녁 먹기로 한 날이라 결혼 후 첫 겨울인데다 프리랜서 인테리어 데코레이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풀세팅하고 갔죠. 베이지 캐시미어 코트에 실크 블라우스, 누가 봐도 센스 있는 며느리 포스 작정하고요.
거실 한가운데 6인용 원목 식탁에 어머님이 끓인 김치찌개 냄비가 가운데서 보글보글하고 나물이랑 전이 빙 둘러 있었어요. 아주버님 내외랑 조카 두 명이 마주 보고 앉았는데 제가 애들을 워낙 좋아하니까 옆자리 조카가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입에 넣었다 뺀 젓가락으로 그대로 나물 한 점을 집어서 조카 입에 쏙 넣어줬죠. 고모가 주는 건 다 맛있다며 웃으면서요. 그때까지 목이 좀 칼칼하고 콧물이 살짝 났지만 티 안 내려고 약으로 억누르고 간 상태였고요. 그런데 평소 말수 없고 얌전하던 동서 얼굴이 그 순간 굳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더니 동서가 말도 없이 의자 밀고 일어나 주방으로 가더라고요. 싱크대 옆 가스레인지에 냄비 올리고 생수 부어 불 켜고, 서랍에서 집게 꺼내더니 식탁으로 돌아와 식구들 다 보는 앞에서 제 젓가락만 집게로 집어 들더군요. 물이 팔팔 끓자마자 그 젓가락을 그대로 투하해서 삶아버리는 거예요. 젓가락이 냄비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데 식탁 공기가 얼어붙고 제 머릿속은 하얘졌어요. 대놓고 벌레 취급하는 것 같아 손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너무 당황해서 내가 동서, 지금 뭐 하는 거야? 했더니 아주 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러더라고요. 형님, 요즘 독감 유행 얼마나 심한지 아시잖아요. 특히 애들은 면역 약해서 위생 진짜 철저해야 하거든요. 라고요. 아니 가족끼리 찌개 같이 먹고 젓가락 좀 섞일 수도 있지, 제가 무슨 병균 덩어리인가요? 온 식구 보는 앞에서 내 젓가락만 집어다 삶는 게 모욕이 아니면 뭐예요?
옆에 남편은 눈치만 보며 입 다물고 있고, 어머님은 어머 동서가 좀 유난이네 하며 제 편인 척 한마디 하더니 말더라고요. 이미 제 자존심은 바닥까지 떨어졌죠. 나중에 알고 보니 동서가 평소에도 제가 위생 관념 없다며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더라고요. 이게 제가 예민한 건가요, 동서가 선을 넘은 건가요? 그날 이후로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혀서 잠도 안 옵니다.
그 젓가락 사건이 있은 뒤로 벌써 두 달이 지났어요. 그날 이후 저는 시댁 발길을 완전히 끊었고 남편에게 그 모욕을 당하고 어떻게 다시 가냐며 매일같이 들볶았어요. 결국 남편도 포기했는지 요즘은 혼자만 시댁에 다녀오더라고요. 남편이 중간에서 눈치만 보던 그날 이후로 부부 사이도 서먹해졌고 시댁 이야기가 나오면 공기부터 싸늘해져요. 그런데 제가 빠진 사이 동서는 오히려 시부모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더라고요.
더 충격적인 건 그날 제가 입에 넣었다 뺀 젓가락으로 나물을 먹였던 조카가 다음 날 장염 증세로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거예요. 동서는 그걸 빌미로 제가 지독한 감기 기운이 있으면서 약으로 억누르고 숨기고 왔다고 시부모님께 다 일러바쳤더라고요. 사실 그때 목이 칼칼하고 콧물이 났던 건 맞지만 가족끼리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나요. 그 일 때문에 어머님은 저에게 전화 한 통 주지 않으시고 사실상 가족 모임에서 제 자리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예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 경제 상황도 바닥을 쳤어요. 리볼빙과 소액 대출이 이미 한계에 다다라 명품 가방과 신발 할부금을 낼 돈조차 빠듯해요. 카드값 돌려막기도 이제는 한계라 현금 서비스까지 손댔는데 다음 달이 더 막막해요. 얼마 전에는 남편이 우편함에서 압류 예고 통지서를 발견하는 바람에 대판 싸움이 났고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어요. 겨우 연출해 온 세련된 데코레이터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동서는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족 단체방에 아이와 남쪽 섬 휴양지에서 한 달 살기 중이라며 비싼 숙소 사진을 자랑하듯 올리더라고요. 좋아요와 댓글로 응원받는 동서를 보니 배신감이 더 커졌어요. 제 인생은 무너져 내리는데 자기는 피해자인 척 동정까지 독차지하고 호의호식하는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았어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어제 동서 SNS에 익명 계정으로 근거 없는 악플을 몇 개 달았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는 게 비참하지만 동서도 저처럼 고통받았으면 좋겠어요. 여운 따위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