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문대 졸업하고 중소기업에서 경리 일 하는 27살 여자입니다. 지금 제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고 비현실적이라 어디에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서 글 씁니다.
2년 넘게 만난 남친이 있어요. 집안 빵빵하고 명문대 나와 전문직 하는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저희 집이랑 격차가 엄청난 건 알고 있었는데 남친이 워낙 다정하고 제 편 들어주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요. 제가 눈치 보고 맞춰가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죠.
지난주 금요일에 드디어 부모님께 정식 인사하는 자리였는데 도심 한복판 프라이빗 한정식 룸이었어요. 방 안은 조용하고 상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공기부터가 얼어붙어 있더라고요. 앉자마자 남친 어머니가 제 졸업장이 어디냐,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냐 꼬치꼬치 캐묻더니 옆에 세워둔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제 앞에 탁 놓으시더라고요.
표지부터가 '혼전 계약 및 육아 위탁 약정서'였어요. 넘겨보는데 손이 아니라 온몸이 덜덜 떨리더군요. 제 학벌이 집안의 '유전적 결함'이라면서 고결한 혈통 보존을 위해서는 제가 철저히 '출산과 양육을 위한 도구'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취지였어요. 사람 앞에 두고 할 소리라고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조항들은 더 가관이었어요. '분만 전까지 매달 태교·영양 관리비 500만 원 지급, 단 건강한 아이 출산 시 보너스 1억 지급', '아이 지능 지수가 140 미만일 경우 양육권 포기 및 즉시 이혼', '아이 명문대 진학 실패 시 지급된 비용 전액 반환'... 이게 계약서예요, 사람 등급표예요? 저를 대리모 이전에 경주마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인격 자체를 지워버리더라고요.
더 소름 돋은 건 옆에 앉은 남친이었어요. 제가 울먹이며 이게 뭐냐고 물으니까 제 손등을 꾹 누르면서 태연하게 그러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네 배경 때문에 반대가 심해서 그래. 네가 이 정도 성의만 보여주면 결혼 허락해주신대. 우리 집 들어오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살 텐데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잖아?'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솔직히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오지 못한 제가 너무 한심해요. 통장은 바닥이고 엄마 병원비에 학자금 대출까지 하루하루가 지옥이거든요. 그 계약서에 찍힌 숫자들만 보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다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제가 너무 혐오스러워요. 사랑했던 사람이 저를 이렇게 값매기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요.
그분들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어요. 어차피 가진 것 없는 애가 결국 도장 찍을 거라는 눈빛. 제가 너무 예민한 걸까요? 아니면 돈 앞에서는 자존심 따위 접어야 하는 게 어른들의 현실인 걸까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