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제 하늘이 뚫린 줄 알았어요. 퇴근 10분 전에 대설경보 재난문자가 울리더니 창밖이 순식간에 하얗게 잠기고 눈이 발목까지 차오르는데, 버스 정류장 전광판은 25분 지연만 뜨고 지하철역까지는 횡단보도도 안 보이는 빙판이라 도저히 걸을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결국 남친한테 울며불며 데리러 와달라고 매달렸죠.
약속한 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 눈보라를 뚫고 헤드라이트 두 줄이 기어오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고맙다고 눈물 날 뻔했어요. 근데 제 앞에 미끄러지듯 멈춘 차 조수석에 웬 긴 생머리 여자가 다리 꼬고 앉아서 핸드폰 액정만 보고 있는 거예요. 제 자리인 조수석에요.
제가 얼어서 문고리도 못 잡고 벙쪄 있으니까 남친이 조수석 창문부터 내리더라고요. ‘아 오는 길에 정류장에서 너무 떨고 있길래 태웠어, 이런 날씨에 어쩌냐’ 하면서 완전 해맑게 웃는데, 그러면서 저보고 뒷자리 타라는 겁니다. 뒷자리에 처박혀서 그 여자 뒷통수만 보는 내내 그 여자는 룸미러로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인스타 릴스만 슥슥 넘기더라고요. 인사도 눈인사도 1도 없이.
자기 동네 근처에서 내리면서 ‘감사합니다’ 딱 한마디 하고 휙 가버리는데, 남친은 그 여자 내리자마자 저한테 ‘너 왜 표정 그래? 사람이 왜 이렇게 박해?’라며 오히려 저를 몰아세워요. 자기는 폭설 속에 사람 구한 영웅이라도 된 양 으쓱해하는데, 저는 제 조수석 뺏기고 뒷자리에 짐짝처럼 실려 온 이 상황이 너무 굴욕적이고 분해서 미치겠어요. 제가 진짜 속 좁고 예민한 건가요?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남친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버티다 어제 결국 크게 터졌습니다. 블랙박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니 그 여자를 정류장에서 태우기 전 이미 편의점에 함께 들러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산 영수증과 음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고요. 오는 길에 우연히 떨고 있길래 태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처음부터 대화를 나누며 목적지까지 정하고 태운 계획된 행동이었습니다.
남친은 끝까지 추위에 떠는 사람이 불쌍해서 커피 한 잔 사준 게 무슨 죄냐며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이더군요. 더 어이없던 건 그 여대생과 헤어진 뒤에도 카톡으로 조심히 들어갔냐며 안부를 주고받은 기록까지 확인한 겁니다. 그걸 그저 사회적 예의라고 우기는데 더 이상 폭설 속 영웅 놀이에 뒷자리에 짐짝처럼 들러리 서고 싶지 않아 그날 바로 짐을 싸서 나와버렸습니다.
지금은 연락을 전부 차단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친구를 통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커뮤니티에 달린 판사님 댓글을 보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었어요. 제 가치를 깎아내리고 조수석을 빼앗는 사람 곁에 있는 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제 조수석의 주인이 되려 합니다. 여러분 직감은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