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견기업 기획팀에서 2년째 버티고 있는 28살 사원입니다. 지금 속이 뒤집혀서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요. 도저히 혼자 삭히질 못하겠어서 여기라도 털어놓습니다. 제가 유난 떠는 건지 솔직하게 판단 좀 해주세요.
저희 팀 박** 대리는 원래 후배들 성과 가로채기로 악명이 자자해요. 제가 TF 맡아서 며칠 밤새워 만든 기획안 있으면 슬쩍 자기 이름 끼워 넣고, 임원 보고 회의 때는 자기가 밤샌 것처럼 입을 털거든요. 맨날 당하고만 있으니까 이번엔 제가 제대로 한방 먹이려고 작정했습니다.
일부러 수치랑 그래프에 치명적인 오류를 잔뜩 심은 가짜 초안을 만들어서, 퇴근 직전에 모니터 바탕화면에 대놓고 띄워두고 탕비실 간 척 자리를 비웠어요. 평소에도 제 자리 뒤로 와서 모니터 훔쳐보는 거 뻔히 아니까 걸려들라고 던진 미끼였죠. 역시나 다음날 대표 보고 자리에서 그 선배가 그 파일 그대로 베껴서 발표를 하더라고요. PPT 서식까지 토씨 하나 안 바꾸고요.
저는 속으로 '아싸 걸렸다, 이제 망신당하겠네' 하고 기다렸는데 세상이 진짜 호락호락하지 않더라고요. 대표님이 그 엉터리 데이터를 보더니 '발상의 전환이다, 기존 시장을 뒤집는 파격적인 역발상'이라며 자리에서 박수를 치시는 거예요. 그 한마디에 박 대리는 순식간에 능력자로 포장돼서 이번 인사에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해버렸습니다.
문제는 오늘입니다. 승진 발령 공지 뜨자마자 저를 복도 끝 탕비실로 따로 불러내더니 씨익 웃으면서 '다 네 덕분이다,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오늘 저녁 호텔 라운지 창가 자리 예약해놨으니 꼭 오라고, 승진 턱 쏜다고 해서 홀린 듯 따라갔죠. 근데 테이블에 앉자마자 제일 비싼 샴페인이랑 치즈 플래터, 안주 세트를 다 시키더니 메뉴판을 제 쪽으로 슬쩍 밀더라고요.
"지은아, 솔직히 네 그 기획안 덕분에 내가 영감 제대로 받았잖아. 네가 날 과장으로 만들어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는 네가 축하하는 의미로 쏘는 게 도리 아니겠어? 이게 나중에 네 평판에도 도움 될 거야." 진짜 얼굴에 철판 깔고 저러는데 귀를 의심했습니다.
결국 계산서 120만 원 넘게 나온 걸 제가 할부도 안 되고 일시불로 긁고 나왔습니다. 선배는 옆에서 '역시 지은이는 의리 있다'며 박수 치고 직원들한테 생색내고 있고요. 제가 진짜 호구인 건가요, 아니면 저 선배가 제정신이 아닌 건가요? 당장 회사 익명 게시판에 캡처본 다 풀고 싶은데 괜히 찍혀서 잘릴까 봐 손만 떨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