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퇴근시간 2호선 진짜 사람 미어터지더라고요. 4학년이라 졸업 논문에 취업 준비까지 겹쳐서 어깨가 돌덩이처럼 무거운데 겨우 비집고 탔거든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방에 밀려 있는데 딱 눈살 찌푸려지는 장면이 보이더라고요.
제 바로 앞, 문 옆에 그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 아시죠? 거기 웬 여자애가 다리 꼬고 너무 당당하게 앉아 있더라고요. 화려한 트위드 재킷에 백화점 쇼핑백을 옆자리까지 떡하니 올려두고는 폰만 뚫어져라 보면서 킥킥대고 있었어요. 어르신 세 분은 손잡이 잡고 서 있는데도 비킬 생각 1도 없어 보이는 그 뻔뻔함이 진짜 가관이었습니다.
근데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거예요. 설마 했는데 우리 과 3학년 민경이더라고요. 학교에서는 교수님 앞에서 세상 착하고 예쁜 척 혼자 다 하더니, 밖에서는 저렇게 공공질서 무시하고 다니는 줄 꿈에도 몰랐네요.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폰 들어서 사진 한 장 찍어버렸습니다.
제가 너무 예민한 건가요? 그래도 명색이 대학생이라는 애가 배려석 하나 양보 못 하고 앉아 있는 게 너무 역겨워서요. 과 단톡방에 사진이랑 같이 올렸더니 애들 다 수근거리고 난리 났는데, 정작 본인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제 톡을 읽고도 답이 없네요. 이런 애는 사회적으로 제대로 망신 좀 당해봐야 정신 차리는 거 아닌가요?
나중에 제가 임신해서 저런 사람들 때문에 서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지금부터 혈압이 오르네요. 공익을 위해서라도 이 사진 그냥 익명 커뮤니티 여기저기에 다 퍼트리는 게 맞는 거겠죠?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건이 있은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네요. 그날 과 단톡방과 익명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 한 장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민경이는 한동안 학교에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결국 이번 학기 휴학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기들은 그 사진을 계기로 민경이의 평소 태도와 허영까지 들추며 비난을 쏟아냈고, 저는 과의 고질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정리된 것 같아 은근히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민경이 쪽에서 그날 지하철에서 사진 찍은 사람을 찾고 있다더군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준비 중이라는 말까지 들립니다. 저는 익명으로 올렸고 공익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당당한 마음입니다. 법무법인에 다니는 선배에게 물어봐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적반하장식 대응이 더 비난받아야 할 일 아닌가 싶습니다.
민경이 친구들로 보이는 몇몇이 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긴장되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제 신념을 꺾을 생각이 없습니다. 무너진 공공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생기는 작은 잡음 정도로 여깁니다. 이제는 민경이뿐 아니라 임산부석에 앉은 다른 사람들도 계속 포착해 시리즈로 올려볼까 고민 중입니다. 바로잡아야 할 일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게시글 아래에 달리는 사이다라는 댓글들을 볼 때마다 제가 한 일이 옳았다는 확신이 듭니다. 민경이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인생 공부를 단단히 했길 바랍니다. 배려가 무엇인지, 타인의 시선이 얼마나 매서운지 제대로 알게 됐을 테니까요. 저는 오늘도 카메라 앱을 켠 채 지하철 안 핑크색 좌석 근처를 유심히 살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