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덜덜 떨려서 키보드가 자꾸 미끄러지네요. 오늘 제 결혼식 날이었어요. 네, 이제는 과거형이 맞겠네요. 예식장 바로 옆 프랜차이즈 카페 구석자리에 가운 벗어던지고 혼자 숨어서 이 글 쓰고 있어요. 홀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됐고 저는 식도 안 올리고 파혼 통보하고 뛰쳐나왔습니다.
신랑이랑은 2년 3개월 정도 만났어요. 누가 봐도 제 말이면 다 들어주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탄탄한 중견기업 다니면서 악착같이 돈 모았다고 하더라고요. 신혼집도 부모님이 보태주신 2억에 자기 돈 얹어서 아예 제 명의로 해주기로 했었어요. 저는 그 성실함 하나 믿고 이 결혼을 밀어붙인 거고요.
문제는 식 시작 5분 전이었어요. 신부 대기실에서 립 덧바르고 하객들이랑 기념사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진행팀이 신랑이 안 보인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어요. 친구 두 명이 로비랑 흡연실 쪽 뒤지러 뛰어가고, 저도 드레스 끌릴까 봐 양손으로 부여잡고 대기실 문 열고 복도로 나갔죠. 홀 입구 지나 맨 끝 비상계단 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짜증이 아니라 애원하는 톤으로 들리더라고요.
살금 다가가서 난간 사이로 봤는데 눈이 뒤집혔어요. 턱시도에 부토니에까지 꽂은 신랑이 처음 보는 여자 앞에 진짜로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 '제발 오늘 하루만 지나가게 해줘, 끝나면 바로 연락할게' 하면서 목소리 떨면서 매달리는데 그 여자는 팔짱 끼고 완전 얼음장이었어요. 제가 헉 하고 나타나니까 신랑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몸으로 그 여자를 가리면서 그냥 아는 동생이다, 오해하지 말라더라고요.
제일 어이없던 건 시부모님 태도였어요. 소란 듣고 달려오시더니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런 좋은 날에 왜 유난을 떠냐, 신랑 망신 주지 말고 들어가라'고 저한테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그 여자는 제가 입 열 틈도 없이 신랑이 등 떠밀어서 비상문으로 밀어내 버렸고요. 하객 200명이 다 보는 앞에서 신랑이 다른 여자한테 무릎 꿇고 비는 걸 목격했는데 제가 웃으면서 버진로드를 걸어야 하나요? 제가 예민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