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남기고 간 건 빚쟁이 독촉장 뭉치랑 요양원 침대에 누운 엄마, 그리고 가슴팍에 15년째 박혀 있는 복수라는 칼자루뿐이었어요. 그 칼을 쥐여준 사람이 지금 제 맞은편 소파에 앉아 양주 잔 기울이며 인자한 척 웃고 있는 예비 시아버지, 오 회장이에요. 15년 전 시골 공단 맨 끝자락 20평짜리 부품 공장을 하청 단가 후려치기랑 허위 납품 트집으로 말려 망하게 하고 공장 셔터에 빨간 딱지 붙게 만든 게 바로 그 인간입니다. 그때 쪽박 찼던 우리 집과 달리 그 인간은 지금 지역 유지랍시고 상공회의소 앞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아요.
그 집 외아들 도윤 오빠랑 처음 엮인 건 3년 전이에요. 오빠가 매일 들르던 테니스장 바로 옆 통유리 카페에서 일부러 알바를 잡았죠. 땀에 젖은 유니폼 입고 코트에서 나오던 오빠는 계산대 안쪽에 서 있던 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했어요. 깔끔한 폴로셔츠에 순진하게 웃는 눈매, 누가 봐도 금수저 티 나는 매너. 저는 그 눈빛이 얼마나 쉽게 속는지 속으로 코웃음 치면서도 천천히 목줄을 조였어요. 그 3년 동안 예비 시어머니 생일 파티 초대 명단부터 회사 내부 행사 사진까지 그 집안 속살이란 속살은 다 훑어서 머릿속에 저장해뒀죠. 영혼이고 뭐고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어요.
그리고 어제, 30층 호텔 라운지 통유리창 너머 야경이 다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도윤 오빠가 다이아 반지 내밀며 청혼했어요. 오빠 왈 제가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맑아서 자기가 가진 거 전부 다 줘도 아깝지 않대요. 웃기지 않나요? 제가 원하는 건 오빠 사랑이 아니라 오빠네 집안 간판이 땅바닥에 처박혀 부서지는 소리인데. 제일 꿀잼은 오 회장이 라운지 입구에서 저를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잿빛으로 굳던 순간이에요. 제가 누구 딸인지 기억도 못 하면서 본능적으로 제 눈빛에 서린 독기는 귀신같이 알아채더라고요. 그 표정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 도장만 찍고 식만 올리면 저는 그 집안 하나뿐인 상속자 도윤 오빠의 아내가 돼요. 오 회장이 평생 핥고 핥아 쌓아 올린 그 가증스러운 돈과 명성, 안방 금고부터 서재 패까지 하나씩 가루로 만들어줄 겁니다. 도윤 오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1도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쩌겠어요. 아빠가 저지른 업보는 아들이 같이 짊어지는 거죠. 사랑? 그런 간지러운 감정은 저한테는 독이에요. 이제 진짜 복수 1막 올립니다. 기대하세요.
결혼한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인 척하는 연기는 이제 숨 쉬듯 자연스러워졌어요. 오 회장은 여전히 저를 경계 어린 눈으로 훑어보지만 남편은 이미 제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밤마다 남편에게 다정하게 속삭여 집안의 핵심 자금 흐름을 관리하던 담당자를 교체하도록 했고, 그 집안이 숨겨온 민망한 기록과 사진들이 제 클라우드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요. 주변에선 제가 복 받았다며 부러워하지만 그 시선이야말로 제가 원하던 가면입니다.
가끔 제 자신이 소름 끼칠 때가 있습니다. 남편이 저를 보며 행복하다며 눈물까지 글썽일 때 순간 심장이 흔들리거든요. 그럴 때마다 요양원 침대에 누워 초점 없이 허공을 보는 엄마 얼굴과 15년 전 공장 셔터에 붙은 빨간 딱지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 부자가 쌓아 올린 허울뿐인 행복을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절대 멈출 수 없다는 다짐이 다시 단단해져요.
하나만 귀띔하자면 오 회장의 컨디션은 요즘 눈에 띄게 예민해졌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 챙기는 건강 보조 식품과 식단 덕분이라는 말이 돌지만 그 이면의 긴장감은 본인만 알겠죠. 이미 판은 다 짜여 있고 저는 마지막 장면만 기다리면 됩니다. 조만간 그 집안의 민낯이 세간에 드러나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왜 15년을 복수만 준비해왔는지 모두가 알게 될 거예요.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