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글을 쓰는데 너무 당황해서 오타가 나도 이해해주세요. 이게 제가 예민해서 호들갑 떠는 건지, 아니면 진짜 소름 끼치는 상황인지 제발 누가 판단 좀 해주세요.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려서 미치겠어요.
저한테 고등학교 때부터 15년째 붙어다닌 절친이 있어요. 서로 부모님 집까지 드나들 정도로 가족이나 다름없고, 자취 시작하면서 현관 비번도 공유했어요. 서로 집 비면 택배 넣어주고 분리수거 대신 해주는 그런 사이요. 저는 걔를 진짜 제 반쪽이라고 믿고 살았어요.
일이 터진 건 어제 저녁이에요. 걔가 일주일간 해외여행 가면서 화분 물이랑 환기 좀 부탁했거든요. 저녁에 들러서 창문 좀 열어주고 주방 상부장 위 선반을 정리하는데, 안쪽 구석에 분홍 벨벳 상자가 하나 있더라고요. 걔가 평소에 절대 남 손 안 타게 하던 보물상자라길래 순간 호기심에 손이 가버렸어요. 뚜껑이 살짝 걸려있길래 그냥 열어봤죠.
근데 상자 맨 밑바닥, 접힌 손수건 안에 돌돌 말린 열쇠 하나가 딱 보이는 거예요. 보자마자 소름이 쫙 끼쳤어요. 제 집 현관 보조키예요. 예전에 술 먹고 잃어버린 줄 알고 도어락으로 갈아엎은 뒤에도 불안해서 서랍 깊숙이 넣어둔 그 구형 열쇠요. 분명 제 방 서랍 제일 안쪽에 넣어뒀던 건데 왜 걔 집 상자에 있냐고요.
머리가 진짜 하얘지더라고요. 걔가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서 가져간 건가? 근데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도 준 적이 없어요. 더 기괴한 건 그 상자 안에 제가 작년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귀걸이 한 짝이랑, 제가 쓰는 향수 미니어처 샘플들이 일렬로 꽂혀 있었다는 거예요. 마치 전시하듯이요.
그 순간부터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걔가 제가 없을 때 제 집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있었을까, 제 서랍을 뒤졌을까 생각하니까 온몸에 닭살이 돋고 구역질이 나요. 걔는 모레 돌아오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면서 톡 할 텐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당장 따져 물어야 할까요, 아니면 조용히 손절해야 할까요? 이게 절친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 일이 있고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15년 절친과는 완전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내가 분홍 벨벳 상자 속 보조키에 대해 묻자 친구는 오히려 내가 부탁받은 화분 물과 환기를 넘어 상부장을 뒤진 것을 문제 삼으며 너야말로 소름 끼치는 관음증 환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 물건이 왜 네 상자에 있냐고 물었을 뿐인데 되레 내가 가해자가 된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내가 예전에 만났던 전 연인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 보조키를 상자 안에 보관하면서 내 집에 있던 사진들을 꺼내 보고 내 사생활을 들여다봤다는 얘기를 공통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귀걸이 한 짝과 향수 샘플이 일렬로 전시돼 있던 모습까지 겹쳐지니 인간에 대한 환멸이 밀려왔다.
나는 바로 이사를 결심했고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 따로 대응할까도 고민했지만 그 이름과 더 엮이고 싶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지금은 보안이 철저한 오피스텔로 옮겨 누구에게도 현관 비번은 물론 위치조차 알리지 않고 지낸다. 택배도 무인 보관함을 쓰고 분리수거도 혼자 한다.
가끔 밤에 혼자 있을 때 현관 쪽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창문을 열어둔 날이면 더 예민해진다. 하지만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부모님 집까지 드나드는 사이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걸. 이제 나는 누구도 쉽게 믿지 않으려 한다. 그게 내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